우리가 흔히 판소리라고 싸잡아 일컫는 것 속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단가, 판소리, 창극, 승도창, 병창, 창작 판소리 등이 그것이다. 판소리의 오랜 역사 속에서 판소리가 이런저런 다른 것을 파생시키기도 하고, 달라지기도 해서 생겨난 것들이다.
단가:
본격적인 판소리 창을 하기에 앞서 부르는 짧은 노래를 가리키는데, 허두가(虛頭歌), 초두가(初頭歌), 단가(端歌), 영산(靈山), 영산(瀛山) 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했으나, 지금은 단가(短歌)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고 있다. 현재 부르고 있는 단가는 40여 가지가 되는데, 이 중에서 널리 애창되는 단가는 [진국명산]·[죽장망혜]·[운담풍경]·[편시춘]·[장부한]·[초한가]·[홍문연]·[적벽부]·[사철가]·[사창화류]·[백발가]·[이산저산]·[효도가]·[호남가]·[강상풍월]·[녹수청산] 등이다. 단가는 본 판소리를 하기 전에 부르기 때문에, 가볍게 부르는 것이 보통이며, 악상도 화평한 평조(平調)가 대부분으로 지나치게 슬픈 곡조는 피한다. 단가의 내용은 절실한 현실의 문제보다 관념적이고 환상적인 문제를 다룬 것이 대부분이다.
사설의 이면에는 인생무상과 풍류적 낙천성의 두 가지 주된 정서가 깔려 있는데, 이 중에서도 인생무상감이 주류를 이룬다. 단가의 이러한 내용은 단가의 기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단가의 마지막 구절은 '거드렁거리고 놀아보자', '헐 일을 허여가면서 놀아보자'와 같은 청유형으로 끝을 맺고 있다. 청중들은 이러한 청유형으로 인해 창자를 '우리'라는 일체감 속에서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청중들은 남의 놀이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 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단가는 이렇게 하여 소리판을 활력이 넘치는 공간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판소리:
애초에는 열두 바탕이 있었다. 판소리의 작품 수를 나타내는 말로 '마당'을 사용하기도 하고, '바탕'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바탕'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한다. 소리꾼들이 '마당'이라는 말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전통 시대에 광대들이 하던 연예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마당에서는 줄타기나 땅재주를 하고, 대청에서는 기악을 하고, 안방에서 판소리를 했다. 그러니까 '마당'이라는 말은 판소리에 대한 평가 절하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땅재주나 마당에서 하지, 어디 판소리를 마당에서 하는 법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판소리에 '마당'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바탕이 되는 소리'라는 뜻으로 '바탕소리'라는 말을 쓰기도 했고, 한 바탕, 두 바탕 등으로 말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해서 여기서는 '바탕'이라는 말을 쓰기로 하였다.
애초에 있었던 판소리 열두 바탕은, [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변강쇠가]·[옹고집타령]·[배비장타령]·[강릉매화타령]·[무숙이타령]·[장끼타령]·[가신선타령]이다. [가신선타령] 대신에 [숙영낭자전]을 넣기도 한다. 이 중에서 [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 다섯 바탕은 현재까지 잘 전승이 되고 있으나, 나머지 일곱 바탕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시기에 전승에서 탈락했다. [가신선타령] 외에는 소설로 된 것이 남아 있어서 내용은 다 확인할 수 있다. [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의 내용은 익히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소개를 생략하고, 다소 생소할 것으로 생각되는 [적벽가]부터 그 내용을 소개하기로 한다.
적벽가
기본 줄거리는 {삼국지연의}의 적벽대전을 중심으로 한 부분을 차용하고 있는데, 유비와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를 하고 공명을 모시러 삼고초려를 하는 대목부터, 적벽대전에서 공명이 동남풍을 빌어 조조의 군사를 대파하고, 마침내 관우가 조조를 사로잡았다가 놓아주는 대목까지 부른다. 그러나 세부에 있어서는 우리 실정에 맞게 새로이 창작된 부분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박동진 씨는 늘, "예전에는 소리꾼이 소리하러 가면요, '[적벽가] 하실 줄 아십니까?' 이래 물어가지고, 모른다고 하면, '[춘향가] 할 줄 아는가?' 그러지요. 그래 모른다고 하면, '[심청가] 할 줄 아냐?' 이렇게 말을 합니다."라고 했다. 이는 그만큼 [적벽가]가 높이 평가되었다는 뜻인데, 특히 양반 청중들이 [적벽가]를 좋아했다고 한다. [적벽가]는 전투 장면이 많고, 등장 인물도 장수들이 대부분이어서, 호령하듯 외치는 소리가 많아 부르기가 힘들고, 알아듣기 어려운 말도 많다. 그래서 요사이는 잘 부르지 않는다. [적벽가]는 해방 후에는 임방울이 잘했고, 그 뒤를 이어서 박봉술, 박동진 등이 잘 했는데, 지금은 김일구, 송순섭 등이 가끔씩 부르고 있을 뿐이다.
변강쇠가
[가루지기타령], 또는 [횡부가(橫負歌)]라고도 하며, 신재효 사설집에 전승에서 탈락한 일곱 바탕의 소리 중에서는 유일하게 실려 있다. [변강쇠타령]은, 남도에 사는 천하 양골 변강쇠와 황해도에 사는 천하 음녀 옹녀의 이야기이다. 변강쇠와 옹녀는 성애만을 추구하다 자기 동네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는데, 이들은 중간에서 만나 부부가 된다.
처음에는 도시 살림을 해보지만, 강쇠가 놀기만 일삼고 강짜만 부리기 때문에 살지 못 하고, 지리산 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도 놀기만 일삼던 변강쇠는, 장승을 베어다 때고는 장승 동티가 나서 죽는다. 변강쇠를 치상하는 과정에서, 치상한 후에 옹녀와 살기로 하고 변강쇠를 치상하려던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땅에 드러붙는 변괴가 생긴다. 그러나 사당 거사패들과 뎁득이가 지성으로 귀신에게 빌어, 붙었던 궁둥이가 떨어져 치상을 한다는 내용이다.
옹고집타령(雍固執打令)
소설 {옹고집전}이 전하고 있어 내용을 알 수 있다. 옹진(雍眞)골 옹당촌(雍堂村)에 사는 옹고집은 욕심 많고 심술궂어, 매사를 옹고집으로 처리한다. 옹고집은 또 불도(佛道)를 멸시하여, 동냥 온 중들에게 행패를 부리다가 도승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도승은 도술을 부려,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로 또 하나의 옹고집을 만든다. 허수아비로 만든 가짜 옹고집은 옹고집의 집을 찾아가 진짜 옹고집을 내어쫓고, 그의 아내와 같이 산다. 진짜 옹고집은 가짜에게 쫓겨난 후, 갖은 고생 끝에 개과천선(改過遷善)하고, 도사의 용서를 받은 다음, 다시 집에 돌아와 살게 된다는 내용이다.
배비장타령(裵裨將打令)
소설 {배비장전}이 남아 있어 내용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서울의 김경(金卿)이라는 양반이 제주 목사가 되어 부임하는 길에, 서강(西江) 사는 배선달을 비장(裨將. 조선조 때 감사·수사·병사·유수 등을 따라다니면서 일을 돕던 벼슬아치.)으로 데리고 간다. 배비장은 도덕군자인 체하는 사람으로, 제주에 도착하여 주색을 멀리하고 도도하게 지내는데, 상관인 제주 목사의 명을 받은 기생 애랑(愛娘)과 방자의 계교에 의해, 애랑의 유혹을 받고 애랑의 집에 찾아갔다가 알몸으로 뒤주 속에 갇힌 채 바다에 버려진다. 배비장이 버려진 곳은 바다가 아니라 사실은 감영의 뜰이었는데, 배비장은 이를 모르고 헤엄쳐 나오다가 둘러선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행실의 바름을 뽐내던 배비장의 허세가 드러나고, 형식에 치우쳐 공허한 유교적 도덕 관념이 통렬하게 풍자된다. 최근에 박동진에 의해 판소리로 불려진 바 있다.
강릉매화타령(江陵梅花打令)
[매화타령]이라고도 한다. 강릉 부사의 책방(고을 원이 사사로이 임명하여 그 비서 일을 맡아보던 사람) 골생원이 강릉의 일등 명기 매화를 만나 즐겁게 지내는데, 서울에 와서 과거를 보라는 부친의 편지가 온다. 서울에 온 골생원은 과거 시험 답안에 매화를 그리워하는 시를 써내고 낙방하여 강릉으로 돌아온다. 강릉 부사는 거짓으로 큰 길가에 매화의 무덤을 만들고, 매화가 죽었다고 한다. 골생원은 매화의 무덤에 가 통곡하고, 매화의 초상화를 그려 껴안고 지낸다. 그러다가 황혼 무렵, 사또의 지시로 매화가 귀신인 체하고 골생원과 만난다. 다음날 매화는 골생원을 나체로 경포대로 유인하고, 골생원은 매화와 함께 자신들의 넋을 위로하는 풍악에 맞추어 춤을 추다가, 사또에 의해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장끼타령
[자치가(雌稚歌)]라고도 한다. 장끼가 까투리의 말을 듣지 않고 콩을 주워 먹다가, 차위(짐승을 잡는 틀)에 치어 죽자, 까투리는 여러 새들의 청혼을 받게 되나, 결국 문상 온 홀아비 장끼에게 시집가서 잘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무숙이타령
[왈자타령(曰者打令)]이라고도 한다. '왈자'는 건달을 가리키는 말인데, 중고제 명창 김정근(金定根)이 잘 했다고 하나, 소리는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다. 주인공 김무숙은 대방(우두머리)왈자로, 서울 중촌(中村) 갑부의 아들이며, 여자 주인공 의양은 평양에서 선발되어 궁중에 바쳐진 내의원 소속 기생이다. 의양을 한 번 본 무숙이는 대번에 반하여, 의양이를 기생 명부에서 빼내어 함께 살림을 차리게 된다. 의양은 살림을 제법 규모 있게 꾸려나가지만, 무숙이는 여전히 허랑방탕한 생활을 한다. 보다 못한 의양은 무숙의 본처, 노복 막덕이, 대전별감 김철갑, 다방골 김선달, 평양 경주인 등과 공모하여, 무숙을 극도의 경제적 궁핍에 빠지게 함으로써, 마침내 개과천선케 한다는 내용이다.
가신선타령(假神仙打令)
사설이나 소리가 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신선이 되려고 금강산에 들어가, 노승에게 신선이 먹는다는 복숭아와 술을 구해 먹었으나, 속고 만 이야기라는 정도의 윤곽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병창 :
병창은 악기를 연주하면서 판소리의 특정 대목을 부르는 것인데, 가야금 병창과 거문고 병창이 있다. 가야금 병창이 언제쯤 생겼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9세기 말에 활동했던 전남 영암 출신의 김창조와 충청도 사람인 박팔괘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병창의 명인들이 많이 나왔는데, 김창조 문하에서는 오수관, 한성기, 강태홍, 이소향과 같은 대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오수관의 아들 오태석은 역대 가야금 병창의 최고 명인으로 꼽히며, 정남희, 김종기, 한성기 등도 병창의 명인이었다. 정남희는 전통 판소리뿐만 아니라, 새로이 판소리적 기법으로 만든 노래들도 병창으로 많이 불렀다. 충청도 출신 명인으로는 심상건이 유명하였다.
거문고 병창은 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어 신쾌동(1909-1978)이 유일하다시피 했는데, 신쾌동 이후에는 거문고 병창으로 명인급에 드는 사람이 없다.
병창은 악기를 연주하면서 소리를 해야하기 때문에, 너름새나 발림(동작)을 할 수 없고, 발성의 기교를 제대로 다 발휘할 수 없다. 따라서 병창의 창법은 판소리에 비해 가볍고 쉽다. 대체로 판소리를 하기에는 기량이나 성량이 다소 부족한 사람이 병창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승도창(繩渡唱) :
승도창은 줄을 타면서 부르던 판소리라고 하는데, 전승이 끊어져 현재는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 없다. 승도창에 관한 기록도 없다. 줄타기나 땅재주같은 곡예를 하던 사람은 판소리 창자와 같은 재인 광대 계층에서 나왔다. 판소리 명창 중에서 이날치는 줄타기를 하다가 판소리로 전환하여 명창이 되었으며, 장판개도 줄타기의 명수였었다. 이정업 같은 고수도 본래는 줄타기를 하였으나, 줄을 타던 중에 부상을 당하여 후에 고수로 전환하였다.
이렇듯 줄타기와 소리를 한 사람이 한 적이 더러 있었던 것으로 보아 판소리와 줄타기의 관련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창극
창극은 연극처럼 여러 명의 인물이 등장하여, 각기 배역에 따라 연기를 하면서 판소리를 부르는 연극적 판소리이다. 최초의 창극은 1902년 가을 고종의 즉위 40년을 경축하는 행사를 거행하기 위하여, 지금의 광화문 새문안교회 터에 신식 극장인 원각사를 설립하고, 그 경축 행사 준비의 칙명을 받은 김창환이 전국의 남녀 명창을 불러들여 준비한 [춘향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행사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두 번이나 연기된 끝에 유야무야되고 말았고, 1903년 가을 강용환에 의해 창극 [춘향전]이 공연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의 창극은 무대 천정에 전등을 밝히고, 배경으로 둘러친 흰 포장 앞에서, 여러 창자들이 둘러 서서 각자 맡은 배역의 소리를 하는 정도였다. 이러한 양식의 창극은 193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본격적인 창극은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가 결성되고나서부터 만들어졌다. 이 때의 창극은 무대 조건을 완전하게 갖추고, 새로운 대사를 많이 삽입하여 연극적인 요소를 많이 갖게 되었다. 1936년에는 조선성악연구회 직속으로 '창극좌'를 두었고, '창극좌'는 이후 194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체되기까지 여러 편의 창극을 공연하여 히트시키면서, 창극의 전형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해방 이후의 창극계는 여성이 주도하게 되었는데, 여성으로만 조직된 여성 단체가 난립하는 가운데, 공연 작품도 전통 판소리를 벗어나 설화나 야사, 야화 등으로 확대되었다. 레퍼터리가 전통 판소리를 벗어나면서 명칭도 '국극'으로 바뀌게 된다. 한 때 상당한 인기를 누리던 여성 창극, 국극은 1958년 이후 기울기 시작하여, 1960년에 이르러 거의 자취를 감추면서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지게 되었다.
창극과 비슷한 것으로 입체창이 있다. 입체창이란 몇 사람의 창자가 배역을 정하여, 그 배역에 맞는 소리를 하는 양식이다. 특별한 무대 장치나 연기는 하지 않으나, 간단한 분장은 하기도 한다.
창작 판소리 :
창작 판소리란 기존의 전통 판소리 외에 새로이 만들어진 판소리를 말한다. 1904년에 김창환에 의해 만들어져서 원각사에서 공연되었다는 [최병두 타령]이 아마도 최초의 창작 판소리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최병두 타령]은, 강원도 관찰사 정 아무개라는 사람이 그 고을 양민 최병두를 잡아다가 곤장으로 때려 죽이고 재산을 빼앗았다는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일인창 형태의 판소리가 아니라, 다수의 창자가 출연하는 창극 형태였다.
이 [최병두 타령]은 후에 이인직에 의해 신소설 {은세계}로 각색되었다.
그 외에도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수많은 창극, 혹은 국극 단체에서 공연했던 창극과 국극들도 넓게 보면 창작 판소리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창작 판소리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하는 것이 없다.
해방 후의 대표적인 창작 판소리로는 월북 소리꾼 박동실이 만든 [열사가]를 들 수 있다. [열사가]는 해방 직후 일제에 적극적으로 항거한 인물들인 이준, 안중근, 유관순, 윤봉길 열사의 항일 행적을 노래한 것에 [이순신전]을 합쳐서 이르는데, 1950년대 말 경까지 여러 사람들에 의해 불려졌다.
1970년대에 박동진은 전승에서 탈락된 일곱 바탕의 판소리 복원 작업을 통하여 [변강쇠가]·[숙영낭자전]·[배비장전]·[장끼타령]·[옹고집전] 등을 불렀으며, [성웅 이순신]·[성서 판소리]·[유관순전] 등의 판소리를 창작하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파되지는 못 했으며, 본인도 자주 부르지는 않았다. [변강쇠가]만이 인기가 있어 박동진 자신에 의해 가끔 공연되고 있으며, 완창 음반이 나와 있다.
1980년대 들어 젊은 사람들 가운데, 전통 민중 예술 장르를 사회 변혁 운동의 도구로 삼고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임진택은 판소리의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임진택은 [소리 내력]·[똥바다]·[오월 광주] 등의 판소리를 만들어, 80년대의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판소리를 통한 사회 비판과 풍자에 주력하였다.
창작 판소리는 변화하는 시대적 요구를 판소리에 담아내기 위한 노력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창작 판소리를 통한 그러한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일회적인 데 그침으로써, 구전적 전통 속에 흡수되어 생명력을 얻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