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에서 장단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장단을 친다'라는 말을 많이 쓰기 때문에, 장단이 북 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만 알기 쉽다. 그러나 장단은 북 치는 일과의 관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장단은 치는 것이기도 하지만, '짜는 것'이기도 하다. 장단을 짠다는 것은 소리를 어떤 장단의 틀에 맞춰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 장단은 소리와 관계가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장단이 맞다'는 말도 쓴다. 맞다는 말은 어떤 것을 다른 것과 비교했을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예컨대 판소리를 할 때 소리와 북의 장단이 맞다고 한다면, 소리와 북의 장단이 서로 잘 어울린다는 뜻이겠다. 그러므로 이럴 때는 장단이라는 말이 소리와 북 모두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 민속음악에서는 장단의 틀이 어떤 음악 전체를 통제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시나위 같은 음악은 여러 가지의 악기가 각기 다른 선율을 연주하면서도 장단의 틀만은 꼭 지켜나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조화의 조화'를 실현한다. 산조의 경우에도 전체 형식을 규정하는 것은 장단의 틀이다. 가령 '진양조 ― 중모리 ― 중중모리 ― 자진모리 ― 휘모리'와 같은 형식적 틀을 지킨다. 판소리를 가르칠 때는, 음정은 다소 틀려도 별로 상관을 하지 않지만 장단이 틀려서는 안 된다고 세심한 주의를 한다. 그리고 용어의 측면에서 볼 때도 장단에 관한 용어가 발달되어 있다. 이는 그만큼 우리 음악, 특히 판소리에서 장단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장단은 매우 복잡한 개념이다. 필자는 장단이 음악의 요소 중에서 리듬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리듬은 또 다양한 층(level)을 가지고 있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여기서는 장단을 리듬의 여러 가지 층위 중에서 박자의 수준에서 말한 다음, 리듬의 본질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판소리 장단은 가장 쉽고 일반적인 수준에서 보면 서양 음악의 박자에 해당된다. 박자는 두 개 이상의 박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연속해서 반복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판소리의 박자는 일곱 가지가 있다. 박자를 배울 때는 북을 치면서 배우는데, 북으로 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원박이라고 한다. 원박은 실제 소리에 맞춰 북을 칠 때는 거의 치지 않고, 이를 다양하게 변화시킨 변화형(가락)만을 치지만, 설명과 교육의 편리상 상정해 둔 것이다.
판소리 장단의 원박을 구음(口音. 악기의 소리를 입으로 내는 특정한 소리로 표현한 것)과 정간보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진양조: 24박(6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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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모리: 12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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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중모리: 12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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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진모리: 4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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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모리: 4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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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모리: 5박(혹은 10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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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중모리: 6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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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조는 24박이 아니라 6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진양조를 북으로 칠 때는 그 네 개의 마디를 각각 다르게 치지만, 단순히 시간적 배분으로만 생각하면 똑같은 여섯 개의 마디가 네 번 반복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양조가 6박인가 24박인가 하는 문제는 그다지 심각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중모리와 중중모리, 자진모리와 휘모리를 박 수가 같은데도 구별하는 것은 패턴이 다르기 때문인데, 도표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진모리는 12박으로 보기도 하며, 엇모리도 5박 혹은 10박으로 의견이 엇갈려 있지만, 이러한 이견은 똑같은 대상을 어떤 차원에서 보느냐 하는 관점의 차이에 불과할 뿐이다.

클라게스(Klages)라고 하는 학자는 리듬을 파도의 운동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다. 바닷가에 서서 파도가 밀려오는 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모래사장으로 파도가 계속해서 밀려온다. 우리는 거기서 리듬을 느낀다. 밀려오는 파도는 앞에 오는 것과 그 다음에 오는 것이 비슷하다. 그러나 같지는 않다. 비슷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같은 파도라고 알 수 있다. 그러나 똑같지는 않기 때문에 매번 오는 파도가 새롭다. 리듬은 바로 그런 것이다. 똑같지는 않아야 하지만, 또 같은 것이라고 할 만큼 닮아야만 한다. 같지 않아야 한다는 측면이 리듬의 '자유'라는 특성을, 닮아야만 한다는 측면이 '구속'의 측면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리듬은 자유와 구속의 두 가지 상반되는 힘의 긴장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우리는 장단의 원박이 음악 속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패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원박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실제로 이제 막 배우기를 시작한 고수가 아니라면, 북을 칠 때 원박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치는 일은 없다.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 변화된 리듬형(가락이라고 함)은 원박의 패턴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소리 또한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그것이 무슨 장단으로 되어 있는지 항상 확인할 수 있도록 닮았다. 늘 변화하지만, 항상 어떤 패턴을 벗어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장단의 리듬으로서의 본질이다.

어떤 리듬학자는 '태초에 리듬이 있었다'고 한다. 리듬은 변화를 그 본질로 한다. 그런데 우주가 시작될려면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변화 속에서 시간은 시작된다. 시간이란 변화에 대한 지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주는 완전한 조화 속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변하기는 하지만 인간이 예측할 수 있을 만큼의 패턴을 지닌 변화, 바로 그것이 우주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태초에 리듬이 있었다'는 말은 변화와 조화 속에서 우주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할 수 있다. '태초에 장단이 있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