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가 어느 때, 어떻게, 어떤 사람에 의해 불려지기 시작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여기서는 판소리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를 통해 추정해 보고자 한다. 판소리는 '긴 이야기를 노래로 부르는 양식'이다. 그러니까 판소리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판소리의 바탕이 되는 이야기가 있어야 하며, 이를 노래로 불러야 할 필요와 노래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판소리의 근원이 된 이야기를 근원설화라고 하는데, 이는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 내부에 전해 내려온 것들이다. [수궁가]의 근원설화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라고 한다. 이는 김춘추가 고구려에 청병하러 갔다가 염탐꾼으로 몰려 옥에 갇혀 죽게 되었는데, 고구려의 신하 선도해(先道解)가 옥으로 찾아와 해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심청가]의 근원설화로는 역시 {삼국사기}에 있는 '효녀 지은' 등이 거론되기도 한다. 이렇듯 판소리의 근원이 되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 내부에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인 것이다
[춘향가]의 근원설화로 유명한 것은 조재삼(趙在三. 순조 때의 문인)이 {송남잡지(松南雜識)}에서 들고 있는 것으로, 남원 부사의 아들 이도령이 동기(童妓)인 춘양(春陽)과 사랑을 맺은 후에 서울로 올라갔으나, 춘양은 수절을 하다가 새 사또인 탁종립에게 죽었는데, 호사가들이 이를 슬퍼하여, 노래를 만들어 춘양의 원한을 풀고 정절을 찬양했다는 내용이다. '박색고개 전설'도 [춘향가]의 근원 설화로 자주 언급된다. 관기 월매의 딸이자 천하 박색인 춘향이 이도령을 사모하여 병이 든다. 월매의 계교로 둘이 하룻밤 인연을 맺었으나, 이도령은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상경해 버리고, 춘향은 자결을 한다. 박색고개에 묻힌 춘향의 원혼에 의해 신관 사또들이 부임하는 길로 죽게 되자, 장원 급제한 이도령이 내려와 춘향의 전기를 짓고, 제사를 지낸 뒤, 광대로 하여금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판소리는 어떤 하나의 설화가 바로 하나의 작품으로 되었다기보다도, 여러 가지 설화가 합쳐져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여러 가지의 이야기가 섞여져서 길고 복잡한 이야기가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에서 들고 있는 [춘향가]의 근원설화는 판소리의 발생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암시를 주고 있다. 우선 [춘향가]라는 판소리가 광대에 의해 불려지게 된 것은 춘향의 원한을 달래기 위한 굿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긴 이야기를 노래로 불러야 할 필요성도 생기고, 또 그 노래를 부른 사람들이 누구인가도 드러나게 된다. 곧 원혼을 위로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당들이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굿은 무당이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광대들에 의해 판소리는 굿으로부터 시작이 되어 판소리로 발전하면서, 내용도 '원통하게 죽은 춘향'에서 '죽을 뻔한 춘향'으로, 인물은 박색에서 미인으로 바뀌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판소리는 우리 민족의 삶과 문화의 심층에 뿌리박고, 오랜 세월에 걸쳐 자기변모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해내려온 전승예술이기 때문에, 발생의 근원을 따진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의 근원에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정노식 같은 이는 판소리의 근원을 신라시대의 화랑의 음악에까지 소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판소리로 인식할 수 있는 형태로까지 변모·발전된 시기는 그리 오래지 않을 것이다. 그 시기가 어느 때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문헌을 통해서 판소리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는 최초의 시점은 영조 무렵이다. 영조 때 사람인 만화재(晩華齋) 유진한(柳振漢)의 문집 {만화집(晩華集)} 가운데 [가사 춘향가 200구]가 실려 있는 것이, 현재까지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판소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작자인 유진한은 {어우야담(於于野談)}의 작자인 유몽인의 6대 종손으로, 영조 때 천안 지방을 중심으로 인근에 알려진 문인이었다. 그의 아들 금(夥)이 쓴 글에 의하면, 유진한은 숙종 38년(1711)에 나서 정조 15년(정조 1791)에 죽었다. 또 금이 쓴 [가정견문록(家庭見聞錄)] 가운데 "부친께서 계유년(1753년)에 남쪽으로 호남 문물을 돌아보시고, 그 이듬해 봄에 집으로 돌아오시어 춘향가 일편을 지으셨는데, 이 또한 당시 선비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라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진한은 1754년에 [춘향가]를 지었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이 [춘향가]의 끝에 "늙은 시인이 타령의 가사를 쓰다"라는 구절이 있어, 소위 [만화본 춘향가]는 지은이인 유진한이 호남의 산천문물을 구경하는 가운데 들은 바 있었던 타령([춘향가])의 가사를 한시로 옮겨놓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를 통해 호남지방에 이 때 이미 [춘향가]가 존재했으며, 노래로 불려지고 있었고, 그리고 또 충청도 선비가 감동을 받아 한시로 번역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세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특별히 호남을 돌아본 후에 지은 것으로 봐서, 충청도 지방에는 이 시기에 판소리가 없었거나, 있었다고 해도 보편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화본 춘향가]의 내용은 현재의 [춘향가]와 매우 흡사하다. 긴 사설을 짧은 한시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세부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보아 이야기의 줄거리와 등장 인물은 현대의 것과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실제 [춘향가]의 발생 시기는 이로부터 상당한 기간을 소급해야 할 것이다.
이 시기에 생존했으리라고 생각되는 소리꾼은 하한담(혹 하은담이라고 함), 최선달, 우춘대 등이다. 우춘대는 1810년 경에 씌어진 것으로 보이는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라는 시에 등장한다.
장안에선 모두들 우춘대를 말하지만
오늘날 누가 능히 그 소리 이어갈까
한 곡조가 끝나면 술동이 앞에는 천 필의 비단이 쌓이는데
권삼득과 모흥갑이 소년으로 이름있구나
이 시의 내용으로 보면, 1810년 경에 우춘대는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명창이었으며, 이제는 후계자가 누가 될 수 있을 것인가가 관심사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우춘대는 18세기 말 경부터 활동을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우춘대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하한담과 최선달은 전주 신청의 대방(大房)과 도산주(都山主)였다고 한다. '신청'은 무부(巫夫. 무당 가계의 남자)들의 조직체인데, 당시에 무부들은 여러 가지 연예에 종사하고 있었다. 대방은 각 도에 있는 신청의 우두머리를 말하며, 도산주는 대방을 보좌하는 직책으로 2명이 있었다. 최선달에 관해서는 충청도 결성 사람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하한담은 [갑신완문(甲申完文)]이라는 광대들의 집단 민원에 대한 관청의 처분을 적은 글에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전주 신청의 대방이었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전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 판소리사 초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관우희]에서 주목되는 점은, 송만재가 이 시를 쓰게 된 연유를,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에 급제하면 광대·재인들을 불러 노래와 재주를 구경하는 풍속이 있는데, 금년 봄 우리 아이가 과거에 급제하고도 집안이 가난하여 한 바탕의 놀이를 베풀 수 없으므로" 이 시를 짓는다고 밝히고 있는 점이다. 이를 보면 초기의 판소리는 과거 급제와 같은 잔치에 초대되어 가는 형태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 굿으로 시작된 판소리가 이젠 인생의 중요한 계기에 이를 기념하기 위한 축제(잔치)와 함께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의 판소리는 음악성이나 사설 내용이 지금에 비해 훨씬 단순하고 빈약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과 같은 예술성 짙은 판소리는 훨씬 후에 태어난 광대들에 의해 이룩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판소리는 광대, 그 중에서도 특히 무부들에 의하여 불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판소리는 무가와 장단이나 발성법이 거의 같다. 또 판소리 창자들은 거의가 다 남도 지역의 무당 가계에서 나왔다. 이런 이유를 들어 판소리가 무가에서 나왔다고 하는 주장을 '무가기원설'이라고 한다. 그런데 판소리를 음악적 특성으로 말하면 남도의 민요 [육자배기]와 같다. 물론 판소리에 들어 있는 음악 전부가 [육자배기]와 같은 것은 아니다. 판소리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슬픈 가락인 계면조가 [육자배기]와 같다. 판소리가 남도 민요인 육자배기와 같은 음악에서 나왔다는 주장을 '육자배기토리기원설'이라고 한다. '토리'는 민요 선율의 지역적 특색을 가리키는 말이다. 최근에는 또 조선조 후기에 존재했던 판놀음의 일종인 창우집단의 광대소리에서 나왔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창우집단은 판놀음 중에서도 노래를 장기로 삼던 집단을 가리킨다. 그러나 무가기원설이나 육자배기토리기원설, 판놀음기원설은 근본적으로는 다른 주장이 아니다. 남도 무가는 음악적으로는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으며, 창우집단은 판소리를 하는 광대들과 마찬가지로 무당 가계와 갚은 관련을 맺고 있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판소리가 남도 지역의 무가와의 깊은 관련 속에서 생성되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역사 위에 부상된 판소리가 많은 인기를 끌게 되자, 판소리의 가사를 적어 책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것이 이른바 [춘향전]이니, [심청전]이니 하는 판소리계 소설이다. 물론 판소리 가사가 그대로 소설이 된 것은 아니다. 판소리는 노래이고, 소설은 독서물이다. 당연히 옮기는 과정에서 읽기에 편하게 고쳐졌다. 노래는 부르는 순간에 금방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또 판소리는 늘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게 아니고, 부분적으로만 부르는 것이 보통이어서 앞뒤가 잘 맞지 않아도 되지만, 책으로 읽을 경우에는 일관성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 점에 있어서도 다소의 수정이 가해졌다. 이렇게 해서 판소리문학이라고 하는 거대한 집합체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판소리문학과 판소리는 엄연히 다른 것이므로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