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성기

문헌을 통해서 판소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시점은 영조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영조 때 사람인 만화재(晩華齋) 유진한(柳振漢)의 문집인 {만화집} 가운데 [가사 춘향가 200구](흔히 이것을 [만화본 춘향가]라고 한다)가 실려 있는데, 이것이 현재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판소리에 관한 가장 오래 된 기록인 것이다.

[만화본 춘향가]의 내용은 현재의 [춘향가]와 거의 같다. 긴 사설을 짧은 한시로 번역했기 때문에 자세한 세부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보아 '결연 - 사랑 - 이별 - 수난 - 재회'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줄거리와 등장 인물에 있어서는 현재의 것과 차이가 없다. 이상과 같은 사실로 보아 판소리는 이미 18세기 중반 이전, 그러니까 대체로 17세기 말 경에는 불려지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된다.

초기의 판소리는 민중적인 기반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르는 사람도 민중이고 청중도 주로 민중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 판소리는 서서히 양반 지식인 층으로 침투하게 되어 기록자를 만나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여러 가지 변모를 겪게 되는데, [만화본 춘향가]는 그러한 과정의 한 산물로 보인다.
1810년 경에 씌어진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라는 총 50 수로 된 한시에는 판소리 열두 바탕이 등장하며, 우춘대, 권삼득, 모흥갑 등 소리꾼의 이름도 나타난다.

이 시기의 판소리의 존재 양식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역시 송만재가 [관우희]를 쓰게 된 연유를 '우리나라에는 과거에 급제하면 광대 재인들을 불러 노래와 재주를 구경하는 풍속이 있는데, 금년 봄 우리 아이가 과거에 급제하고도 집안이 가난하여 한 바탕의 놀이를 베풀 수 없으므로 이 시를 짓는다'라고 밝힌 부분이다. 이를 보면, 초기의 판소리는 과거 급제와 같은 잔치에 초대되어 가는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인생의 중요한 계기에 이를 기념하기 위한 축제와 함께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판소리는 아직 음악이나 사설의 내용에 있어서 현재의 것보다 훨씬 단순하고 빈약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기 8명창 시대

19세기 초반은 판소리사에서 '전기 8명창 시대'로 일컬어진다. 이 시대에 이르러 판소리는 완전히 12 바탕으로 완성되고, 여러 명의 훌륭한 명창들이 등장하여 판소리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판소리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8명창 시대는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데, 전기는 19세기 전반, 후기는 19세기 후반에 해당된다. 19세기의 판소리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말하는 것은 그 두 시기의 판소리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8명창 시대라고 하면 여덟 명의 명창이 활동하던 시기라는 뜻이겠으나, 여기서는 꼭 8이라는 숫자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8명창 시대란 '여덟 명 정도'의 명창이 활동하던 시기라는 의미이며, 이 때의 '여덟 명 정도'는 그 당시 활동했던 명창들 중에서 뛰어났던 사람들을 총괄하는 의미를 띠고 있다. 또 사람에 따라서 평가의 기준이 달라서 꼽는 사람들도 다르다.

전기 8명창에 거론되는 사람들은 권삼득, 송흥록, 염계달, 모흥갑, 고수관, 신만엽, 김제철, 주덕기, 황해천 등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개발한 구체적인 더늠이나 특별한 선율 형태 등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이러한 다양한 더늠과 선율의 개발을 통해 판소리의 음악적 세련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 시대 각 명창들의 활동 연대와 출신지, 더늠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이 름활동 연대출신지더 늠
박유전1834 - ?전북 순창이별가. 새타령. *서편제 소리의 시조
박만순헌종-고종전북 고부춘향 옥중가. 사랑가. [적벽가]
김세종헌종-고종전북 순창[춘향가]. 천자뒤풀이
이날치헌종-고종전남 담양[춘향가]. [심청가]. 춘향자탄가. 새타령
정춘풍헌종-고종충청도소상팔경. [적벽가]
송우룡헌종-고종전남 구례[토끼타령]. 토끼 배 가르는 대목
정창업철종-고종전남 함평[흥보가]. 중 내려오는 대목
김창록철종-고종전북 무장[심청가]. 심청 부녀 이별 대목
장자백철종-고종전북 순창[변강쇠타령]. [춘향가]. 광한루 경치
이창윤고종전남 영암/td>[심청가]. 심청이 제수 된 것을 고백
김찬업고종전북 흥덕[토별가]. 토끼 화상 그리는 대목

이 시대 판소리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판소리가 궁중에까지 침투하게 됨으로써, 판소리를 감상하는 일이 양반 귀족들 사이에서도 일상화되었다는 점이다. 양반 청중들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해 판소리는 사설·음악·무대 표현 등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평민적 현실 인식과 반중세적 지향의 예술적 심화가 일단 그 사회적 문제성을 상당한 정도로 수정받고, 얼마간은 봉건적 의식의 개입까지도 감수하는 굴절을 겪었다. 그 결과는 전승 다섯 마당의 변개와 일곱 마당의 전승에서의 탈락으로 나타났다.
이 시대 판소리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또 한 사람으로는 고창의 신재효를 들 수 있다. 신재효는 중인 출신으로 자신의 사랑채에 수많은 소리꾼들을 모아놓고 교육을 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판소리 사설의 정리와 개작에 나서기도 했는데, 그 결과가 판소리 여섯 바탕 사설집과 14편에 이르는 창작 단가이다. 신재효는 양반들의 미의식을 매개로 하여 판소리의 개작을 시도했기 때문에, 신재효의 업적에 대해서는 부정적 요소를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

둘째, 서편제 소리의 성립으로 상징되는 서민지향적 감성의 판소리의 대두를 들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점으로 보아 후기 8명창 시대 판소리는, 그 사설 내용에 있어서는 양반의 미의식에 접근해갔으면서도, 감성적인 면에서는 서민지향성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5명창 시대

이 시기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사람들 중에서 5명창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은 박기홍, 김창환, 김채만,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유성준, 전도성, 정정렬 등이다.
이 시기는 서구 문화의 유입과 누적된 사회적 모순으로 조선조 봉건 체제가 해체되면서, 일제에 의한 국권의 침탈이라는 민족적 비운에 처해진 시기이다. 서구 문화의 유입은 판소리 존립의 기초가 되는 전통사회를 그 근저에서부터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판소리도 변화되어가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체 변화를 모색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창극화로 나타났다.

이 시기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사람들 중에서 5명창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은 박기홍, 김창환, 김채만,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유성준, 전도성, 정정렬 등이다.
이 시기는 서구 문화의 유입과 누적된 사회적 모순으로 조선조 봉건 체제가 해체되면서, 일제에 의한 국권의 침탈이라는 민족적 비운에 처해진 시기이다. 서구 문화의 유입은 판소리 존립의 기초가 되는 전통사회를 그 근저에서부터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판소리도 변화되어가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체 변화를 모색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창극화로 나타났다.

대중의 슬픈 소리 취향에 부응하려는 움직임은 송만갑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이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사람은 정정렬이며, 1930년대 이후 슬픈 소리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사람은 임방울과 이화중선이다.

이 시대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일은, 1920년 경에 전국 주요 도시에 권번(기생 조합)이 설치되어 여기서 판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함으로써 다수의 여자 창자가 배출되었다는 점이다.

이 시대에 활동했던 사람 중에서, 5명창에는 들지 못 하지만 주목할 만한 사람으로는 이선유, 장판개, 김정문, 박봉래, 공창식, 박동실 등이 있다.

이 시기의 말기에는 임방울, 김연수, 강장원 등이 활발한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해방 이후의 판소리

해방이 되자, 4일 후인 8월 19일 국악 건설 본부가 발족되었으며, 이는 후에 '국악원'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창극 운동도 다시 활발해져 다시 여러 단체가 생기는 가운데, 1948년 5월에는 여성 국악인 30여 명으로 구성된 '여성국악동호회'가 결성되어, 여성만으로 창극을 공연하게 되었으며, 레퍼터리도 전통 판소리를 벗어나 설화나 야사, 야화 등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 때의 대표적인 창극 단체와 창극은 국극사의 [만리장성], 국극협단의 [예도성의 삼경], 조선창극단의 [왕자호동], 김연수 창극단의 [단종과 사육신] 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한편 여성국악동호회의 [햇님달님]도 공전의 대히트를 하여, 공연장마다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런 호황도 잠깐, 6.25로 인하여 거의 아사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6.25 이후에는 다시 여성국극단이 생겨 일시 인기를 끄는 듯했으나, 마침내는 16개 단체가 난립하는 가운데, 1958년 이후는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4.19 이후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여성국극단의 종말은 판소리의 종말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당시의 판소리는 순수 판소리를 고집하던 임방울, 정응민, 박봉술, 신영채 등 일부 소수를 제외하고는, 창극단이나 여성국극단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화 이후 계속되어온 판소리의 창극화가 여성국극단에 이르러 종언을 고하게 되는 과정은, 장르의 순수성이 무너질 때 그것이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 서구식 무대의 도입에 의해 '청취의 대상'이었던 판소리가 '관람의 대상'으로 바뀌고, 관람의 대상으로서 '볼거리'에 치중하면서 마침내 전통적인 내용과 형식을 벗어나게 되어, 창극은 자멸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여기에 민족적 시련과 서구화에 의한 민족문화의 해체가 가속작용을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1961년 11월에는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가 발족되었고, 1961년 정부조직법의 개정으로 국립극장이 마련되어 여기에 국립창극단이 창설되었으며, 1973년부터는 국립창극단 단원 전원에게 유급제가 실시되어, 정부가 판소리에 대한 지원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판소리를 비롯한 전통문화에 대한 정부의 정책적 개입은, 1964년 일본에 이어 시행된 무형문화재 제도로부터 본격화되었다. 그리하여 1964년 김연수, 정광수, 김소희, 김여란이 판소리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래, 박동진, 박녹주, 박초월, 박귀희, 정권진, 한승호, 강도근, 오정숙, 성창순, 성우향, 조상현 씨등이 지정되어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무형문화재 제도의 실시는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에 대한 국가적 보호의 필요성을 느낀 정부에 의해 시행되었지만, 그 시행 자체가 이미 전통문화가 자생력을 잃었다는 한 증거이기도 하다.

판소리가 재생의 계기를 맞게 된 것은 정부의 무형문화재 지정에 뒤이은 판소리 창자들의 완창 발표회, 그리고 일부 뜻 있는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된 판소리 감상회였다. 판소리 완창 발표회는 판소리 한 바탕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발표회로, 1968년 박동진에 의해 처음 실시된 이래, 판소리 창자 및 감상자들 사이에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확산되었으며, 이제는 이 방식이 소리꾼의 기량을 선보이고 평가받는 방식으로 굳어졌다. 이는 서양식 무대와 서양식 제도를 이용하면서도 전통 판소리를 전혀 훼손하지 않음으로써, 바람직한 방식으로 자리를 확고히 한 것으로 평가된다.